★8월 8일 중독법에 미공개 외전과 삽화15장을 포함한 회지가 발간됩니다!!

썸네일: 츠츠츠츠츳님 (@cc_ccc_cc) 3차 팬아트 감사합니다!


※전혀 다른 세계관이긴 하지만 '걔'의 존재에 대한 설명 혹은 다른 설정반영으로 인해 5부 및 에필로그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중혁독자 기반. 중혁독자로 시작했음을 전제로 하여, 스토리 후반 메인 커플링은 중혁걔+그분독자



※캐릭터 사망 요소, 충격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미리 읽어야 될 이야기

-신을 납치했다 上 - 1 편: http://posty.pe/2zu2em

-신을 납치했다 上 - 2 편: http://posty.pe/a6a22e

-신을 납치했다 上 - 3 편: http://posty.pe/cs2gmo

-신을 납치했다 中 - 1 편: http://posty.pe/7sc1ty

-신을 납치했다 中 - 2 편: http://posty.pe/i5amyh

-신을 납치했다 中 - 3 편: http://posty.pe/k2pjkz

-신을 납치했다 下 - 1 편: http://posty.pe/1201or





날이 아직은 쌀쌀해서 채 겉옷을 벗진 못했지만, 확실히 두꺼운 잠바를 집어넣으니 출퇴근길이 훨씬 편했다. 봄이 아직 오다 말아 큰 일교차는 내내 김독자의 컨디션을 안 좋게 했다. 김독자와 유중혁이 동거하는 집과 연구소는 대중교통을 타고 30분, 차로는 15분정도밖에 안 걸리니 직장 치고는 지척이었으나 그렇다고 가깝다고 할 수도 없는 거리였다. 김독자는 어차피 야근까지 할 거, 하루종일 연구소 안에 있을거면 가볍게 입고 다니자는 주의였고 유중혁은 그래도 왕복 한 시간 가는 거리를 춥게 다니는 게 못마땅해했다. 기어이, 유중혁이 월급날에 제법 이름난 브랜드의 가디건 하나를 사와서 김독자의 옷장에 막무가내로 집어넣었고 그제야 김독자는 웃옷을 조금 더 껴입고 다니기 시작했다.

별다른 게 없는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처음 시작할때는 조금 혼란도 있었지만 벌써 메시아 프로젝트가 3년이다. 김독자는 자신이 맡은 파트에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해져 있었고, 더이상 메시아 프로젝트에 '자원'ㅡ그것이 그들이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피할 다른 방법을 찾다 그리 된 것뿐이지, 자원이 아니라는 건 공공연한 비밀에 가까웠다ㅡ하는 사람이 부족한 일을 논하는 데에도 거부감이 없었다.

메시아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후로 연구소에서는 프로 플레이어들을 부를 일이 줄어들었다. 일단 버츄얼 액팅이 필요한 종류의 일이 아니기도 하고, 버츄얼 액팅은커녕 시작 단계에서 벗어나지조차 못하는 프로젝트가 연구소 전체를 점령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유중혁은 이번엔 다른 대기업의 버츄얼 액팅에 참여하는 모양이던데, 그쪽에서도 광고를 제안해왔으나 거절한 모양이었다. 김독자는 유중혁이 넌지시 던지는 말에 그냥 일 하고 오지 그랬어, 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일전에 유중혁이 너무 많은 광고를 나가는 것ㅡ그래서 사실 광고 자체가 문제라기보단 유중혁의 광고 영상 캡쳐본이 너무 많은 곳에서 소위 '남친짤'로 돌아버린 것ㅡ으로 둘이 한번 대판 싸운 게 여전히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과정은 조금 구질구질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둘은 화해했으며, 그 경험은 유중혁의 광고 제안 계약 검토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관계는 평온했다.

두 사람의 직장도 안정적이었고, 둘 다 야근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다. 유중혁은 들어온 광고제안을 모조리 거절한 덕인지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는 나날들은 집에서 쉬며 요리를 즐겼다. 여유로운 것은 김독자도 마찬가지였는데, 출퇴근을 안 하는 것도 아니고 야근을 안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예전처럼 며칠 내내 집에 돌아오지 못한다던지 하는 살인적인 스케쥴은 없었다. 근래 들어 메시아 프로젝트가 안정기에 접어들자 연구소는 더이상 과학자들을 쪼지 않았다. 짧게는 몇십 년, 길게는 백 년도 될 수 있는 엄청난 장기전일 것을 감안해서인 티가 났다. 덕분에 비교적 정상적인 근무 환경을 갖게 된 이들이 자발적으로 열심히 연구에 매진했고,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사기를 끌어올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다들 연구에 미친 족속들이니 메시아 프로젝트만이 가진 특유의 스케일과 독특함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김독자 역시 예외는 아니었으며, 삶에 여유가 생기자 일에 조금 더 긍정적으로 임할 수 있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김독자는 그날 출근하면서 전날에 동료들이 식사자리에서 했던 이야기를 곱씹어보고 있었다. 잘하면 동성 결혼이 합법화될수도 있겠다더라. 김독자도 유중혁도 스물 여덟이었고, 두 사람 다 변변한 가족관계가 없어 명절날에 감수해야 하는 잔소리는 없었어도 결혼을 생각해볼 나이였다. 그리고 사실상 둘의 동거가 삼년째로 접어들면서 그들의 생활은 거의 사실혼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결혼이란 말을 떠올리자 심장 한쪽이 뻐근하고 묘하게 간질거렸다. 김독자는 그날 내내 마음 속 어딘가가 간질거리는 상태로 출근했다.

연락이 온 것은 점심때쯤이었다.





신 을  납 치 했 다





안드로이드는 꿈을 꾸지 않는다.

학계의 정설이다. 꿈이란 인간이 수면 상태에서 무의식 속의 감정과 기억을 표상하여 정리하는 과정으로, 인간과 같이 살아 움직이는 동물에게만 존재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안드로이드에게는 무의식이 없으며 그나마 비슷하게 따질 수 있는 것이라곤 내부 메모리에 저장해놓고 꺼내지 않는 저장자료와 같았다. 그러나 이는 무의식과는 다르다. 그들의 의지로 꺼낼 수 있으며, 딱히 제어가 흐트러질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김독자는 꿈을 꾸고 있었다. 김독자는 꿈 속에서 또다시 꿈을 꾸는 자기 자신을 보았고, 그리고 그 속에서 그 옛날의 '김독자'가 미래를 보는 것을 목격했다. 아, 이건 기억난다. 자신의 51%에는 나머지 내막이 없지만 유일하게 남아 있던 기억이었다. 그러니까 그 날 문을 열고 들어온 그를...

그 때 김독자는 미래를 보았다.

김독자는 눈을 떴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뻐근했고, 눈을 뜨자 주변이 온통 어둡고 온몸이 단단한 것에 둘러싸여 있어 덜컥 겁이 났다. 여기가 어디지? 하지만 몇 초, 몇 분이 더 지나자 김독자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욱신거리고 뻐근한 것은 같은 자세로 오랫동안 기절해 있어서 그런 것 뿐이지 몸에는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어디가 부러지거나 다치지도 않았고 움직일 수도 있었다. 김독자가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한정적이었는데, 그것도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니 어느새 보이기 시작했다. 김독자가 갇혀 있는 공간은 사방팔방이 닫혀 있고 어두운, 상자처럼 좁은 직육각형의 형태였는데 팔다리를 조금 움직일 수도 있었고 숨을 쉴 만한 공간도 충분했다. 관에 갇히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여유 공간은 있었지만 몸에 맞춤형처럼 제작한 공간마냥 팔다리가 딱 들어맞았다. 그러나 관이라고 하기엔 사방이 온통 차가웠고 금속이었다. 김독자는 팔을 구부리고 손을 뻗어 눈앞의 벽들을 더듬거렸다. 김독자가 처음부터 여기서 나고 자란 게 아니니까, 누군가가 김독자를 여기 넣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야 김독자는 자신이 1863호와 함께 오다가 기절했음을 기억해냈다. 기절하기 직전 1863호가 팔을 휘두를 때 꼼짝없이 끝났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이 아직도 조금 생생했다. 하지만, 김독자는 죽지 않았으며 온몸이 멀쩡했다. 차가운 금속성의 벽을 더듬거리고 밀어보며 김독자는 생각했다. 1863호는 어디 있지?

김독자는 1863호가 자신을 GDB에 다시 데려가는 것이 그의 '김독자'를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인간은 상대를 고유한 하나의 개체로 인식하며 그것은 보안형-안드로이드도 비슷하게 가지고 있는 사고 방식으로, 1863호에게 있어서 '김독자'는 오로지 GDB에서 신으로 존재했던 단 한 명의 개체일 것이다. 그러니 이 GDB에 남아 있는 49%의 김독자와 지금 별개로 떨어져 나간 자신인 51%의 김독자를 다시 합치려고 했다는 건 타당한 추측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지금 김독자가 눈을 떴으며, 김독자는 다시 원래의 신神체에 병합되지도 않았으니 틀렸다는 게 증명된 셈이다. 예측은 틀렸다.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김독자는 고민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는 무엇을 하려고 했지?





1863호가 태연하게 뱉은 말에는 그 3호도 대꾸할 바를 찾지 못했다. 할 말이 없었다기보단 너무 당황한 결과였다. 김독자가 인간이었을 적의 2만년 전의 세계는, 3호가 그려본 적도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애초에 그건 3호의 관심 밖이다. 3호는 현재의 자신의 품안에 있는 김독자만이 중요하지, 김독자가 그 이전에 어떤 존재였을지에 대해 집중하고 싶지 않았다ㅡ필시 김독자의 과거 역시 김독자에게 속하므로 전혀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김독자의 모든 시간선을 포용하게 된다면 그 시간선에 항상 존재했던 '이전의 유중혁들'까지도 알아야 하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1863호는 3호가 충격을 받거나 말거나 전혀 개의치 않고 여전히 골목 한쪽에 서 있는 채로 주변을 계속해서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2만년 전의 지금 이 시대에 약속을 잡아 놓고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는 듯한 태도였다. 그 와중에 아주 멀리에 학교가 있는지, 예민한 안드로이드의 청력에 아이들이 왁자지껄 웃으며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계속해서 빈민가의 반지하 방에 갇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3호로서는 이 모든 것이 너무나 낯설었다. 중앙 정부의 연합군이나 길거리를 메운 디폴트 안드로이드, 하늘을 가득 채워 귀를 찢을 듯한 안드로이드-비가청주파수 중 그 무엇도 여기에는 없었다. 온 거리가 텅 비어 있는 느낌이었다. 햇빛은 맑고 청명했고, 공기가 낯설고, 바람이 이상했으며 주파수의 영역에선 지나치게 조용했고 소리의 영역에선 지나치게 다채로웠다. 이런 세계에 김독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가장 이상했다.

3호는 항상 김독자를 안전한 세계로 데려가 머무는 것을 꿈꿔왔지만 여지껏 한 번도 그런 세상을 마주해본 적이 없다. 그의 기억 속에서 김독자는 항상 거대한 진공관과 서버, 전선다발로 구성된 기계였으며, 이제는 겨우 막 인간형 안드로이드에 이식된 어떤 존재였다. 그리고 고작 그 한 단계를 넘어오면서도 그들은 쫓기고 숨으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이곳에는 김독자에 대해 그 어떠한 위협도 없어 보였다. 세상이 평온하고 멀쩡했으며,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그 누구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신은커녕 안드로이드의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잘 '보존'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그 어떤 인간도 존재해오지 않은 미지의 행성에서 발견한 울창한 산림을 보듯 3호는 골목길을 바라보았다. 낡고 이제는 쓰이지 않는 자재들로 구성된 벽과 집들이었지만 비효율적이라기보다는 경이로워보일 지경이었다. 때론 인지의 범주를 지나치게 멀리 벗어난 것들은 편견에 의해 격하되기보단 오히려 미지라는 이름으로 격상된다. 3호에게 있어서 이 세계가 그랬다.

3호는 이 시대에 속하지 않은 존재였다. 그리고 따지고 보자면 1863호도 그랬는데, 1863호가 존재했던 시대와 3호가 존재했던 시대는 같은 시대라고 보기 충분했다. 그만큼 간격이 짧았다. 1863호 역시 이 시대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이 광경이 낯설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3호의 눈에 1863호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1863호는 마침내 와야 될 곳에 왔다는 듯한 얼굴로 평온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으며, 아주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다. 3호는 그 지점에서 형언키 어려운 불안감과 불쾌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3호의 일상에서 1863호는 김독자와 3호만의 세상에서 자꾸만 끼어드는 관념적인 불청객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1863호에게는 이상할 것 없이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는 무대에 자신이 끼어든 불청객이 된 느낌이었다. 무언가 벌어지려 하고 있었으며 그 일련의 과정에서 이 세계와 1863호만이 필요했다.

3호는 보고서를 보아 알고 있었다. 1863호는 회귀지점에서 수거되었으며 어떠한 과정을 거쳐 그렇게 파괴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회귀지점을 사용했다. 만약 1863호가 계속해서 여러 번 회귀지점을 사용한 게 아니라면 3호는 바로 1863호가 산산조각이 나는 그 과정에 있다. 그리고 1863호는 그 과정에서 신을 죽이려고 했다. 3호는 1863호가 혹시 이 세계의 김독자에 대한 일체의 위협을 가한다면 바로 저지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1863호는 누군가를 죽이려고 시도할 것치곤 제법 편안한 표정이었다.

넌 여기서 뭘 할 셈이지?

다분히 목적성이 있는 질문이다. 날선 3호의 목소리를 들은 1863호는 기분이 나쁠 법도 한데 태연하고 여상하게 대답했다.

...기다리고 있다.

무엇을?

3호는 어이가 없어졌다. 2만년 전의 세계에 기다릴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 여기서 1863호가 기다릴 수 있는 상대라곤 딱 한 명밖에 없었다. 혹시 2만년 전의 김독자를 볼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가능성은 3호에게도 기대감으로 작용할 수 있었지만 1863호가 무엇을 하려고 드느냐가 그보다 더 중요했다. 만약 1863호가 2만년 전의 김독자에게...

'유중혁'을 기다리고 있다.

...뭐?





김독자에게 연락이 온 것은 점심을 먹으려고 막 자리를 정리하던 시점이었다.

유중혁과의 안정적인 연애를 지속해가면서 김독자도 상당히 유해진 면이 있었는데, 그 덕에 연구소 내의 사람들과 김독자와의 관계도 꽤 개선이 되었다. 몇 년 전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이제는 밥 때가 되면 김독자에게 밥 먹으러 가자고 말을 건네는 이들도 있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각각 성향이 제각각이었는데 김독자에게 치댈만큼 성격이 좋은 이들은 밥 때에 대해서도 철저하고 칼같았다. 재미나게 연구에 집중하다가도 점심 시간이 가까워지면 밥 언제 먹으러 가냐, 우리 오늘 메뉴는 뭐 먹냐 하고 시덥잖은 잡담에 열을 올린다. 날 때부터 밥 먹는 것에 큰 의욕이 없는 김독자였고, 특별히 유중혁의 요리 솜씨를 계속 맛보다보니 더더욱 구내식당의 밥에 대해 시큰둥한 김독자였지만 점심 메뉴 자체에 대해선 흥미가 많았다. 좀 드문 메뉴가 나오면 집에 가서 유중혁한테 너 이거 할 줄 아냐, 하면 또 음식이 유중혁 버전으로 다시 만들어지는 과정이 재미있었던 것이다. 그날은 누가 구내식당에서 커리와 난이 나왔다고 말을 흘렸다. 카레를 좋아하는 이들은 입맛을 다셨고 몇몇 이들은 오늘은 따로 구비된 밥과 김이나 먹어야겠다고 난색을 표했다. 김독자는 당장 먹을 생각보다는 유중혁이 커리와 난을 할 수 있는가, 집에 있는 오븐으로도 탄두리와 같은 효과가 날 것인가에 대한 호기심에 가득 찼다. 전화가 울린 것은 그때였다.

김독자의 핸드폰은 오로지 업무용과 비상 연락용으로만 기능하는 물건이었다. 연락처의 반 이상은 직장 동료들로 그마저도 꼭 자신에게 연락이 필요한 같은 부서 사람들과, 지시를 내리는 상급자들이 전부였다. 대부분은 연구소의 내선전화로 연결을 하니 개인전화까지 필요하지 않다 싶은 사람들의 번호는 있지도 않았다. 가르쳐 준 적도 없었고 걸려오는 낯선 번호의 전화는 다 연구소일 것이라 짐작하면 대개는 맞았다.

그 외에 있는, 유일한 사적인 번호는 유중혁의 번호뿐이었다. 오 년 전이라면 김독자에게도 다른 번호가 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몇 년에 한번씩 주기적으로 거의 연락하지 않는 사람들의 번호를 지워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었으므로 기어이 그가 스물 여덟이 될 때쯤에 살아남은 사적인 번호는 유중혁뿐이었다. 물론 이수경의 번호 역시 있기는 했지만 그 번호는 김독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외웠으므로ㅡ자의로 외운 것은 아니고 잊을래야 잊을 수 없어 차라리 머릿속에 박혔다고 하는 게 더 옳겠지만ㅡ저장할 필요도 없었고 저장하고 싶지도 않았다.

딱히 '연애함'에 유난하지 않던 김독자가 드물게도 유중혁에게 걸려오는 전화벨소리만큼은 다르게 한 것은 그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여러 명이었으면 모를까 거의 하나밖에 없는 사적인 연락처의 벨소리나 화면 표시를 바꿀 정도의 세심함은 김독자에게도 남아있었다. 그러므로 김독자는 언제 어디서 유중혁에게 전화가 걸려와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첫째로 거의 들을 일이 없는 다른 벨소리를 사용했기 때문이었고 둘째로 애초에 두 사람이 일과 중 서로에게 전화를 거는 일이 거의 없어 민감하게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김독자는 점심을 먹으러 나가던 중 들릴 리 없는 소리를 들어서, 곧바로 받은 것이었다.

김독자의 기억에 유중혁은 오늘 일이 없어서 집에서 쉬는 날이었다. 그리고 유중혁은 절대로 김독자의 정규 근무 시간을 방해하지 않는다. 미리 말해두지 않은 야근을 할 때 정도나 먼저 문자를 보내보고 답이 없으면 전화를 했지 이렇게 대낮부터 전화를 할 타입이 아니다. 예정에 없는 일이 일어나서 김독자는 핸드폰을 집어드는 그 순간까지도 별 생각을 다 했다. 혹시 점심 같이 먹자고 하는 걸까? 연구소 앞까지 이미 왔나? 그간 유중혁의 행동이 다소 로맨틱한 지점을 자주 보여왔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수신 버튼을 누르는 순간 전혀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고 김독자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명확히 알게 되었다.

유중혁 씨 친구분 되십니까? 이 번호가 유중혁 씨 핸드폰에 긴급전화로 지정되어 있어서...

누구시죠?

김독자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남자가 자신의 신원을 댔다. 경찰이었다.

그날 그 전화 한 통을 기점으로 모든 것이 완벽하게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1863회차쯤 되었을 때, 더이상 보안형-안드로이드는 단순히 신을 지키는 존재가 아니었다. 1863호는 이제 자유자재로 GDB에 접속해서 원하는 정보를 빼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정보의 읽기는 단순히 무언가를 알아내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1863호는 자신의 의지와 목적을 가지고 명백히 김독자를 '읽었다'.

신의 메모리 안에서 '김독자'라는 한 개인에 대한 기록을 찾아내는 건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의 근원이 되는 존재에 대해 찾을 때 곧바로 김독자라는 하나의 이름과 그의 신원정보 자체는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김독자의 신원정보는 말 그대로 키, 나이, 몸무게와 인종, 혈액형 등이 적힌 의료적 프로필일 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1863호ㅡ정확히 말하자면 그 이전의 회차에서 1863호로 이어지는 모든 보안형 안드로이드ㅡ의 목적은 김독자의 신체에 대해서 알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1863호는 신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었고 욕망은 김독자에 대해서도 다를 바 없었다. 999호부터 몇천 년 이상 이어진 유별난 애정은 시제를 따지지 않고 모든 신에 대한 집착으로 승화해버렸는데 그 끝은 결국 신의 근원이었다.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신이 신이 되기 이전 이름이 김독자였다는 것을 알아내는 데에만도 이십 회차 이상이 걸렸다. 해당 정보 자체가 사실상 거대한 국가적 기밀로 보안이 걸려 있는 자료인지라, 정부 고위급 인사의 권한에서 접속해도 열어보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몇 번을 시도한 끝에 김독자의 정보를 대략적으로 알아낸 그는 여전히 갈증을 느꼈다. 충분하지 않았다. 기록된 영역에는 김독자의 수치만이 적혀 있을 뿐, 김독자가 어떤 사람인지, 김독자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생활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적혀있지 않았다. 끝없이 시도하던 그가 결국 하나의 자료를 찾아낸 건 숱한 실패 끝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 정보 역시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다른 영역 같았으면 신에게 직접 부탁하여 정보를 오픈해달라고 했을 터이나, 이는 거절당했다.

1863호로서는 신에게 처음 받는 거절이었다. 이전까지는 그가 무엇을 하든 개의치 않고 아무 거부의사도 표시하지 않으며 순순히 모든 것을 내어주는 신이, 처음으로 오류를 일으키고 아무것도 출력하지 않은 것이다. 몇 번을 키보드를 두드리고 액정 패널을 두드리고 한참을 시도한 끝에 1863호는 몇 가지 반응을 얻어냈는데, 까만 화면을 띄우거나, 갑자기 전원을 차단하고 데이터베이스를 리셋하거나, 강렬한 오류에 걸린 듯 GDB내부의 조명을 꿈벅거리는 신이었다. 그전까지는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1863호는 다음과 같은 메세지에 마주했다.

'읽히지 않는 정보입니다.'

메세지의 결이 지금까지와 달랐다. 권한이 부족해서, 너무 기밀이라서 열리지 않는 경우는 대개 '열람 권한이 부족합니다.'와 같은 문구가 떴다. 그러나 읽히지 않는다는 말은 읽을 수 없다는 말이었고, 읽지 못하는 주체는 신 자신일 것이다. 1863호가 안드로이드가 아닌 사람이었다면 여기서 더이상의 실마리를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급기야 1863호는 신의 데이터베이스와 자신을 직접 전선을 통해 연결하는 방법을 택했고, 그렇게 강제로 GDB에 연결된 후에야 김독자에 대한 정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왜 그토록 신이 그 정보를 보여주지 못했는지 깨달았다.

신은 김독자에 대한 정보를 열람할 권한이 없는 게 아니었다.

1863호가 기어이 강제적인 연결로 락을 풀고 들어간 곳에는 수많은 영상들이 남겨져 있었다. 처음에 1863호는 그 영상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한 남자가 계속 나오고 있었다. 장면은 끝없이 바뀌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연구소를 비추기도 했고, 어두운 골목길을 보이기도 했다가 다시 또 아까와 같은 남자가 나오기를 반복했다. 음식이 보이고 누군가 그것을 먹었고, 설거지를 했다가 빨래를 하고, 이불에 파묻혔다가 다시 나와서 어딘가로 이동했다. 카메라는 끊임없이 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야 1863호는 이것이 인조적으로 만든 방송 프로그램이나 다큐멘터리 기록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것은 어떤 사람의 삶을 1인칭 시점으로 촬영한 영상이었다.

그것은 정보가 아니었다. 그것은 신 그 자체가 가진 김독자로서의 기억이었다. 보안이라고 생각한 영역은 트라우마로 인한 억압에 가까웠다.

그제야 1863호는 신이 정말로 인간이라는 것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신 자신은 해당 파일을 자의로 읽거나 되새길 수 없는 듯했다. 실제로 1863호가 해당 영상에 접근하고 영상을 가져오기까지 하는 모든 행동에 그 어떤 제지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무엇을 한 것이냐고 의아해하는 듯한 반응까지 보였으니 틀림없었다. 오히려 그가 전혀 건드릴 수 없었기에 1863호같이 접속하는 외부인 외에는 볼 방법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의 의지였는지, 아니면 신에게도 무의식이 존재하는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1863호는 신 자신도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해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영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져있지는 않았다. 가끔 끊기기도 했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전혀 다른 시간대로 넘어가기도 했다. 어떤 때 영상은 아주 어린 시절을 보이다가 아주 후의 일을 보이기도 했고 제멋대로 앞뒤로 넘어갔지만, 충분히 볼 수 있었다. 드문드문 찍힌 것 같았지만 전체를 이해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그리고 1863호가 김독자를 이해하기에도 무리가 없었다.

김독자의 아주 어린 시절부터 커서까지 뒤죽박죽이 된 모든 기억의 파편들이 매일같이 모이고 흩어졌다. 1863호는 그 파편들 사이에서 하나하나를 주워 퍼즐처럼 끼워모았다. 이건 스물 일곱 살 때의 일, 이건 스물 여덟, 이건 다섯 살 때의 일, 이건 열다섯, 이건 스물 여섯 살, 이건 열 살, 이건 스물 일곱, 이건 스물 다섯, 스물 넷, 이건 네 살, 이건 일곱 살... 조각은 끝이 없었지만 1863호는 그 모든 작업에 지루함을 느끼지 않았다. 하나하나 연결되는 모든 영상이 환희였고 기쁨이었다. 1863호는 기어이 신의 모든 순간을, 김독자의 모든 순간을 알고 자신의 것으로 체화시키고 있었고, 그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단편적이었던 어릴 때의 기억에 비해 김독자는 스물 다섯부터의 기억이 상당히 세밀했다. 모든 인간은 어릴 때보다 그 후의 일을 더 선명하게 기억하므로 이상할 일은 아니었지만, 계속해서 스물 다섯부터의 기억들이 눈에 띄었다. 다른 것보다 선명했음은 물론이요 보정이나 필터라도 씌운 듯이 색감이 달랐다. 영상미로 따지자면 차고 무디고 냉랭한 카메라워킹, 담담한 시선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었다. 1863호는 계속해서 그 기억들을 읽어가면서 무언가를 깨달았다. 김독자는 달라져가고 있었고, 아마 그 달라짐의 원인은 끝없이 나오는 한 사내였다.

남자의 이름을 알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1863호는 여러 번 영상을 되돌려보면서 이십 대 중후반의 '김독자'의 기억에서 끝없이 나오는 남자의 이름이 유중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한참을 '유중혁'을 바라보고, 유중혁을 관찰하고, 유중혁과 생활하는 김독자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깨닫게 되었다.


1863호는 유중혁의 얼굴이 자신과 무서우리만치 똑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김독자는 꾀병을 부리거나 시덥잖은 일로 일을 안 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어지간한 병가 요청은 통과되었다. 그러나 확실히 이번이 더 쉬웠다. 팀장은 김독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주저없이 어서 집에 가보라는 말을 해줬는데, 아마 김독자가 완전히 사색이 되어버린 탓이었을 것이다. 김독자는 병가 허락을 받고, 자리에 돌아와 근무상태에 '오후 병가'를 올려놓고서도 여전히 현실감이 없었다. 받은 연락이 사실이라면 김독자는 며칠, 혹은 그 이상을 연구소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독자는 며칠짜리의 병가나 연차 요청을 올리지 않았다. 당연히 가서 상황을 확인하면 실제로 들은 내용보다는 조금 더 희망차리라, 그래서 내 눈으로 보고 나면 뭐가 다를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희망이 아니라 받아들일 수 없는 일에 대한 방어기제였을지도 모른다.

김독자는 유중혁이 사주었던 가디건을 걸쳐입곤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이 시간에 연구소를 나오는 것도, 택시를 잡아 타는 것도 거의 처음이었다. 한낮의 햇빛이 짱짱한 거리에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주말이 아니면 볼 일이 없는 광경이었다. OO병원으로 가달라는 말과 김독자의 표정을 본 택시기사는 아무 말도 없이 속도를 냈으며 목적지에 다다를 때까지 말 한마디 걸지 않았다. 김독자는 반사적으로 제 몸에 걸린 안전벨트를 한 손으로 쥔 채로 초조하게 도로를 바라보았다. 돈을 내려고 벨트에서 손을 뗐을 때 축축한 기가 느껴지자 그제야 식은땀으로 손아귀가 흠뻑 젖은 것이 느껴졌다.

거짓말일 것이다.

김독자는 자신이 항상 냉정하고 상황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한다고 생각했다. 사교성이 좋은 인간은 아닐지언정 당장에 처한 상황에서 비합리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사사로이 정에 얽힌 결정을 내리는 부류는 아닐 것이라 스스로를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독자는 카드를 택시에 그대로 놓고 내릴 뻔했으며, 응급실을 찾지 못해서 반대 방향으로 갔다. 막무가내로 들어가려던 것을 간호사가 막아서서 어느 분 보호자시냐고 물어볼 때에야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출입증을 받고 나서도 현실감이 없었다. 안내된 장소는 응급실도 아니었다. 어떤 이유에선지 각자 힘없이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들 사이로 김독자는 걸어갔다. 차라리 이 사람들 중 한 명이 유중혁이었으면 나았을 것이다. 그랬다 하더라도 기절초풍할 지경인데 불행히도 그렇지 못했다. 김독자가 안내를 받고, 아픈 사람들 사이를 걸어가 다다른 끝은 수술실이었다. 문앞에 경찰복을 입은 몇 명이 자신을 보더니 다가와서 증을 내밀고 소개를 했다. 또다시 알고 있지만 들리지 않는 이야기가 반복되었다. 김독자가 겨우 기억하는 세 글자는 뺑소니 정도였다.





유중혁, 이라는 단어를 3호는 아주 오랜만에 들은 것 같았다. 김독자는 항상 3호를 유중혁이라고 불렀고 그래서 그것을 자신의 이름으로 받아들였지만, 김독자 외의 다른 존재가 발음하는 유중혁이라는 단어는 너무 낯설고 이질적이었다. 3호는 유중혁이라는 이름이 김독자와 자기 사이에서만 쓰는 어떤 애정어린 호칭이라고만 느꼈지 그것이 어떤 보통명사, 고유명사의 역으로 쓰일 수 있다는 걸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머릿속으로 3호가 자신을 유중혁이라고 부를때 항상 3호가 아닌 다른 누군가ㅡ1863호라던가, 그 이전 회차의 안드로이드들을 생각했다는 것이 생각나자 갑자기 모든 것이 조금 역겨워졌다. 이곳에 서 있는 3호와 1863호는 정확히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리고 아마 1863호가 말하는 유중혁이라는 존재도 그다지 다를 게 없을 것 같았다. 거의 정확한 추측이었다.

이만 년 전의 김독자가 존재했던 세계라면 이만 년 전의 유중혁도 존재했을 수 있다. 타당한 추측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이만 년 전의 세계가 관심 밖이었던 3호에게 1863호의 의도는 오리무중이었다.

기다려서 뭘 하는 거지?

김독자가 왜 신이 되었는지 알고 있나?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고 있다. 3호의 미간이 급속도로 좁혀졌지만 대뜸 과거로 와버리고 그 탈출구도 모르는 상황에서 주도권은 여전히 1863호가 쥐고 있었다. 3호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반박할 수도 없는 질문이었는데다가 실제로 3호는 모르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순순히 모른다고 대답하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1863호가 김독자에 대해 아는 것을 3호 자신은 모른다는 부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바로 그 1863호 앞에서. 때를 가리지 않고 유치한 호승심이 고개를 슬쩍 들어올렸다. 그러나 대답을 하지 않는 게 이미 충분한 답이 되었는지 1863호가 피식 웃었다. 3호의 얼굴은 더욱더 굳어져갔다.

이만 년 전에, 여기서 사고가 하나 일어난다.

사고?

이 골목에서.

그렇게 말하는 1863호의 표정은 마치 오래 전 기억을 되살리는 것 같아서 보는 3호마저 기분이 이상해졌다.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이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를, 심지어 본인도 알 수 없는 영역의 이야기를 그리는 것처럼 하는 건 정말 이상한 감각이었다. 1863호는 마치 이만 년 전 이 자리에 자신이 있기라도 했다는 듯이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고, 감상에 젖은 눈으로 훑었다. 1863호의 왼팔이 조금씩 올라가더니, 왼손의 손가락들이 옆의 담벼락을 가볍게 문질렀다. 낡은 시멘트가루가 조금씩 떨어지고, 오돌도톨한 감촉이 1863호의 손끝에서 느껴졌다. 실재하는 현실이었다. 기록에서 찾은 것과 똑같다.

어떤 이유에선지 몰라도 이 골목길에서 전속력으로 과속한 차는 '유중혁'을 쳤고, 그대로 범인은 사라진다.

말을 잇는 1863호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마치 당장에라도 일을 저지른 당사자가 눈앞에 나타난 듯한 얼굴이었다. 3호는 그런 1863호의 표정 변화가 의아했다. 3호에게 있어서 유중혁의 죽음은 3호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1863호와 같은 얼굴을 가진 또다른 회차의 유중혁이 존재한다면 3호는 주저없이...

그게 무슨 상관이지?

'유중혁'을 친 범인이 사라지고, '유중혁'은 이 자리에 빈사 상태로 발견된다. 그리고 그 소식이, ...

1863호는 문득 고개를 돌려 골목 저 먼 곳을 바라본다. 어느 쪽인지 확실치 않았던 동서남북의 방향을 알 것도 같았다. 저 쪽에서, 아주 멀리서부터 천천히, 차가 골목을 가르며 서행하고 있었다.

...김독자에게 전해졌다.

1863호가 김독자라는 이름을 뱉자 3호가 그제야 움찔했다. 그리고는 1863호를 따라 고개를 돌려서 마찬가지로 차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유중혁을 친 차가 어떤 차종인지 3호는 알지 못하니 해당 차가 그 차인지 아닌지 알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차는 사람을 치기에는 너무나도 느린 속도로 지나가고 있었다. 이곳의 '유중혁'이 어린아이가 아닌 이상에야 저런 속도에 치여 죽을 사람은 없었다.

김독자에게?

2만년 전 이곳의 김독자에게, 그 소식이 전해졌다.

2만년 전의 김독자와 지금의 김독자와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가. 3호는 담담하게 말을 잇는 1863호를 바라보며, 말이 나오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모든 것을 알아채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눈에 힘을 주고 치켜떠도, 정신을 집중해도 1863호의 속 터지게 느린 말소리보다 빠르게 3호가 다른 사실을 더 알아내는 일은 없었다. 1863호는 그런 3호를 잠시 쳐다보았다가, 그들을 향해 가까이 오고 있는 자동차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누굴 치기엔 터무니없이 느린 속도였다.

그래서 그 소식을 들은 김독자가 유중혁을 살리기 위해 신이 되기로 했지.

유중혁을 살리는 것과 김독자가 신이 되는 것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 3호는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모든 일은 이미 일어났으며 3호의 시점에서는 그 일들이 과거라는 것이다. 1863호가 말하는 말을 진실일 것이고, 실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매끄러운 검은색 보닛을 지닌 차는 그들 곁으로 아주 가까이 왔다. 안에서 운전하는 사람의 얼굴 윤곽도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 더 가까이 오면 '유중혁'을 친 범인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3호는 1863호를 바라보았고, 1863호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1863호가 어떤 목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 깨닫기도 전에 1863호의 손이 여러 조각으로 갈라졌다. 길을 막지 말라고 빵빵대던 차주가 놀랐는지 갑자기 빵 소리가 멈췄고, 1863호의 손 안에서 익숙한 총구 끄트머리가 나왔다. 3호도 문제가 있을 때 자주 썼던 무기 중 하나였다. 보통 안드로이드보다 연약한 사람을 죽일 때 쓰는 단순한 총이었다.

, 하는 소리와 함께 한 발이 발포되었다. 일부러 노리고 쏜 것은 아닌지 한 발이 차창의 유리창을 뚫고, 차주의 왼쪽 어깨 위 의자로 박혀들어갔다. 기겁한 차주가 허겁지겁 차문을 열더니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3호가 감흥 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다시 1863호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흠칫, 놀랐다. 그때에 1863호는 마치 풀리지 않던 문제의 답이라도 찾아낸 듯 해맑게 웃고 있었다.

'유중혁'의 사고를 없앨 것이다.

없애면?

1863호는 환히 웃으며 3호를 돌아보았다. 3호 자신조차도 본 적이 없는 자기 자신의 해맑게 웃는 얼굴이었다. 없애면,

김독자는 신이 되지 않는다...

그때에서야 3호는 신을 살해한다는 의미를 알았다.


...김독자는 멀쩡한 인간으로 행복하게 삶을 마감할 것이다!





의사가 김독자를 앉혀놓고 여러가지 말을 했는데 정확히 들리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김독자는 늘 연구를 하며 다른 과학자들과 교류할때도 항상 짜증이 많았다. 핵심만, 결론만 정확하게 정리해서 보내달라는 게 주 요인이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항상 간결하게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늘 김독자의 성질을 돋궜다. 몇날 며칠 야근에 쩌든 머리로는 그런 잡다한 소리가 잘 안들어왔다. 지금이 딱 그 꼴이었다. 김독자는 연신 그래서 살릴 수 있느냐만 물었고 의사는 각종 수술에 대한 동의 여부만 물었다. 참다못한 김독자가 시뻘게진 눈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정확히 생존율에 대해서만 말하라고 일갈했을 때에야 의사가 긴 침묵을 시작했다. 침묵을 끝내고 나온 답은 그 침묵이나 다름없었다. 고작해야 20, 30%에 머무는 알량한 수치였고 그것도 유중혁보다 뼈와 내부 장기가 덜 손상된 케이스에서나 발휘되는 성공률이었다. 김독자는 생각해보겠다고 어물어물 대답했으나 의사는 기다려줄 시간조차 없다고 못을 박았다. 현대 의학의 힘으로 간신히 산소호흡기를 붙여놓고 살려놓고는 있으나, 환자가 사실상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피를 몇 리터를 갈았다고 했다. 급하게 수혈할 혈액들을 모으고 있다고 했다. 김독자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너무 울어서 눈이 아팠고 머리가 띵했고 피곤했다. 이대로 집에 가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유중혁이 거기 있어서 반겨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머릿속에서 아까 본 유중혁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피칠갑이 된 거나 온몸에 멍이 든 것은 그렇다치고 눈을 길게 가르고 지나가버린 흉터만큼은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그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운 김독자에게 쏟아진 말이라고는 기껏해야 눈 잃는 것 정도는 다행이란 소리뿐이었다. 내부 장기의 파열은 그보다 심각하고, 더이상 하반신은 물론이고 거의 몸 전체가 기능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따라들었다. 김독자는 차라리 제 귀를 자르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현대 의학의 힘으론 불가능합니다...... 드라마에서나 들을 것 같은 대사들이 자꾸 제 위를 넘나들었다. 의사와 한바탕 대거리를 한 이후 다시 경찰들 사이에 끌려가서 상황설명을 들었다. 유중혁의 유일한 혈육인 유미아가 해외에 있는 관계로 상황에 대한 처리를 해줄 사람이 '동거인'인 김독자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도 김독자는 동거인이라는 냉랭한 단어의 어감에 책상을 뒤엎고 성질을 부리고 싶었지만 더이상 그럴 기력이 없었다. 화를 낼 힘이 없어서 그냥 말단 경찰 하나가 내미는 물컵을 받아들고 물 한 모금을 마셨다. 눈과 머리 온몸이 불같이 뜨거운 와중에 차갑고 축축한 물만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목과 배만 차가워져서 정신이 드는 것도 같다가도 오히려 엉망이 된 스스로의 몸만 더 잘 느껴졌다.

그러니까 가족분 번호는 모른다는 말씀이시죠. 예. 핸드폰이 수리되고 나면 잠금 풀어주실 수 있죠. 예. 일단 저희도 CCTV를 찾곤 있는데 문제는 남아있는 영상이 전혀 없어요. 누가 고의적으로 지운 것처럼. ...... 아. 그래도 최선을 다해 찾을 테니까 너무 상심하지 마시고...

상심하지 말라니. 그게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김독자는 연신 고개만 젓고 예, 예, 소리만 내뱉다가 더이상 예 할 수 없을 때쯤엔 입을 다물기를 택했다. 빈사상태에 이를 때쯤에야 경찰들이 김독자를 놔주었다. 집에 바래다드릴까요? 순진한 얼굴로 안절부절 못하던 말단 경찰이 다가와 물었으나 김독자는 손사래를 쳤다. 더이상 그 누구하고도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유중혁하고 같이 있고 싶었다. 김독자는 병원으로 몸을 돌리며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병원에 가 봐야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을 다시 봐야 했다. 지금 가장 아픈 건 유중혁일텐데 그걸 보는것조차 힘든 자기 자신이 한심해서 다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김독자는 비틀거리며 병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의사는 몇 가지 수술을 제시하긴 했지만 모두 다 성공률이 낮았으며 정말 잘해도 하반신 마비가 최선이었다. 어디 하나 날아가더라도 고작 살려놓는게 전부인 선택지들은 지나치게 부당했다. 적어도 유중혁이 감당해야 될 만한 선택지는 절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김독자는 저 멀리 보이는 병원 건물을 바라보면서 문득 생각했다. 현대 의학으로 불가능하다고......

실험중인 것들은 현대 의학이 아니다. 의료 과학에서 시도되고 있는 것들은 당장에 보편화할 수 없는 위험한 것들이 너무 많아 의학계에 곧바로 적용시키지 않는다. 병원에서도 적용되지 않은 것들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김독자의 머릿속에 한 가지 방법이 치고 지나갔다.

기계결합-소생 수술은 성공률이 낮은 편이었지만 지금 의사가 제시하는 수술들보단 높다.

김독자는 기계결합 소생 수술을 시행할 시 드는 비용이 얼마가 되는지 알아고 있었다. 그동안 기계를 다루며 어지간히 큰 수는 물리게도 보았다 싶었는데 그런 김독자조차 질릴 만큼 숫자가 길었다. 아무리 촉망받는 연구과학자로서도 댈 수 없는 돈이었다. 그래도 어떻게 장기라도 빼어 판다면 못 만들 돈도 아니었다.

성공률은 그래봤자 30%정도일 뿐이었지만 시도를 못할 것도 아니다. 물론 모든 기계결합 소생술은 자원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김독자는 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연구소에서 어느 정도 인맥과 지위를 갖고 있는 내부인이었다. 몇 가지 기억들이 스쳐지나갔다. 끔찍하군. 도대체 누가 그런 것에 지원을 하나? 나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네가 그런 걸 하도록 놔두진 않을 거다. 김독자는 붓고 간지러운 눈을 한 손으로 비볐다. 미친 새끼...왜 내가 할 일이 생긴다고 생각했을까 그때는. 니가 먼전데. 한참을 웃다 울다 실성한 사람처럼 병원을 바라보며 서있던 김독자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은, 아니었다.

유중혁은 기계결합 소생 수술을 받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리고 유중혁이 원하지 않는다면 김독자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생존이 확실하지도 않은 수술이다. 실패하면, 즉사할 수밖에 없는 종류라는 걸 김독자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제대로 성공한다면 유중혁은 영원히 살게 될텐데, 이 세상에서 가족조차 한 명밖에 없는 유중혁이, 김독자의 목숨값으로 살아난 삶을 달가이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김독자는 떠오른 생각들을 다시 지우며 이를 악물고 병원으로 걸어들어갔다. 현대 의학의 범위 내에서 평범하게,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것이 답이 아닐지라도 그대로 가야 했다.





1863호는 더 자주, 더 깊게, 더 집중해서 스물 다섯 무렵의 김독자를 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유중혁과 지내는 김독자의 생활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김독자의 주관이 담긴 기억이라 미화가 된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그렇게 보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유중혁과 함께하기 시작한 이후 김독자의 나날들은 조금 더 생기있어 보였다. 훨씬 더 사소하고 즐거운 것들에 오래 집중했고, 감정의 폭이 넓어졌고, 그래서 시야가 자주 떨리고, 장면은 마구 뒤바뀌면서도 예전보다 훨씬 더 생동감이 있었다. 제 아비가 자신을 향해 손을 들어올릴 때까지도 과학 다큐멘터리 같이 흔들림 없던 시선과는 다르게 유중혁을 만난 후부터의 김독자의 삶은 액션 영화와 같았다. 인간으로서는 확실히 좋은 변화였다. 

1863호는 나날이 GDB와 자신을 강제로 연결시켜가는 시간이 길어져갔다. 종종 신이 그가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하기도 했으나 1863호는 알려주지 않았고, 신은 1863호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과 연결되어있다는 점에서 크게 만족하여 굳이 캐어묻지는 않았다. 1863호는 여전히 신을 사랑했지만, 마찬가지로 신이 되기 이전의 '김독자'도 사랑하게 되었고, 그 둘을 하나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1863호가,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 사고로 모든 삶을 송두리째 잃게 된 김독자를,

신을 가엾게 여기게 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때쯤 1863호가 도달할 수 있는 정보의 영역은 정부의 고위 관료를 넘어서 세계의 모든 것에 가까웠다. GDB 내부의 정보뿐만 아니라 GDB 영역 전체, 장소 전체를 총괄하며 주의깊게 돌아다니던 1863호는 이미 어떤 한 개체를 발견했는데, 기가 막히게도 영상 속의 김독자가ㅡ정말 드물게도ㅡ거울을 볼 때에나 확인할 수 있었던 어린 김독자의 모습을 한 안드로이드였다. 누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두었는진 몰라도 1863호는 그를 통해 '김독자'를 되살릴 수 있을까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성공적으로 백업이 되지 않는다면 김독자는 둘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그건 1863호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1863호는 온전하게 김독자를 구해야만 했다. 


신은 1863호가 무엇을 하는지 캐어물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1863호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가 요구하는 것은 거의 모두 다 내어주었는데, 이는 정부가 극비에 보관하던 자료까지 그랬다. 무슨 문제가 있으랴 싶었다. 어차피 1863호는 늘 신의 곁에 있었으며 그를 떠나지 않았다. 1863호가 하는 일이라곤 게걸스럽게도 신에 대한 정보란 정보는 다 먹어치우며 하루종일 그에게 몰두하는 것밖에 없었다. 1863호가 지금 당장 인류를 멸망시킬 무기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하더라도 1863호는 그것을 사용하여 인류를 위험에 빠뜨리는 짓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신은 1863호에게 모든 정보의 열람권을 허락했다.

그것이 결정적이었다.

어느 날 GDB에서 1863호가 사라져버린 것을 발견한 신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신은 단 한번도 1863호가 자신을 떠나 세상으로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문을 열고 나갈때까지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저 그가 또다른 새로운 시도를 해보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1863호는 GDB를 탈출한 후 소식이 없었다. 얼마 안 가 난리가 났고 신의 보안을 책임지는 회사 스타스트림과, 신에 관여하는 정부 기관 일부 부처가 모여 회의를 하기 시작했다. 신은 1863호가 어디로 향했는지 CCTV를 향해 알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그 자료를 공개하지는 않았다. 그저 출력 오류만을 냈다. 1863호가 떠난 것은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이대로 1863호가 돌아오면 보안회사 스타스트림에서 그에게 어떤 조치를 취할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863호가 다시 돌아오면 좋겠으면서도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던 신의 갈등은 길지 않았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 신은 다시 1863호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에게 수집되어오는 전세계의 수천만 개 영상들 중 1863호를 발견하는 데에는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신이 그 영상자료들을 분석할 만한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되돌아온 1863호의 모습은 신이 알던 것과 너무나도 많이 달랐다. 부서져 튀어나온 안구와 으깨진 어깨, 조각조각 절단난 다리와 삐져나온 볼트와 너트, 끊어진 전선들은 신이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만일 GDB에 누군가가 음성 장치를 설치했다면, 그리고 신이 자신을 통제할 능력이 없었다면 GDB에는 비명이 울려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신이 뒤늦게 내민 영상에 정부는 빠르게 1863호의 잔해를 수거해갔고, 며칠 후 아무렇지도 않게 재조립된 보안형 안드로이드가 되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넘버를 1호라고 알고 있었고, 정부 역시 '1호' 보안형 안드로이드라고 신에게 입력했다.

신은 1호를 계속해서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1호는 더이상 GDB에 접속하려고 시도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없을 때 CCTV를 종료하고 신과 접촉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는 또다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독자는 1863호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1863호는 웃으며 손을 올렸다. 차주는 혼비백산하여 도망가고 있었으나, 차창 같은 기본적인 엄폐물도 없는 상황에서 느리게 움직이는 인간 하나 못 죽일 것은 아니었다. 그가 유중혁의 존재를 알았는지, 그래서 일부러 유중혁을 죽일 동기를 갖고 차를 몰려고 했는지 아닌지 1863호는 관심이 없다. 그저 1863호가 본 영상 속 김독자의 기억에서 확실히 유중혁을 친 차와 차종이 같고 색깔이 똑같다는 것만 확신할 뿐이었다. 그거면 됐다. 그리고 혹시 이 차가 아니더라도, 다른 경우의 수까지 지켜서 없애면 될 일이었다.

김독자는 이제 신이 되지 않아도 된다.

느릿하게 수정되는 각도와 함께 총구가 또다시 차주를 정조준하고 있었다. 1863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집중했다. 그 순간이었다.

, 하는 소리와 함께 1863호의 팔이 통째로 날아갔다. 제 사지의 부품이 부스러지고 흩어지는 걸 느낀 1863호가 크게 눈을 떴다. 강한 충격과 함께 몸이 왼쪽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검은 짐승처럼 3호가 달려들어 1863호의 뒷목을 잡고 벽에 처박았다. 동시에 목 부분의 부품들이 덜걱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1863호는 그대로 팔을 휘둘러 제 뒷목을 잡은 3호의 손목을 잡아 부러뜨리려고 애를 썼지만, 조금 덜걱거릴 뿐 팔을 부술 수는 없었다. 3호는 1863호보다 더 뒤의 모델이었다. 더 경도가 높은 합금으로 수정된 게 틀림없었다. 3호의 팔이 흔들린 찰나 1863호가 그대로 3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전투모드로 태세를 수정했다. 1863호가 이를 악물었다.

무슨 짓이지?

아까 목을 잡혔을 때 음성 기관이 부서진 것인지 나오는 목소리는 기이하게 변조된 기계음이 섞여있었다. 1863호의 물음에 3호가 천천히 한 걸음씩 다가왔다. 아까 순순히 대답을 듣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냉랭하게 굳어진 얼굴만 거기 있었다.

'신을 죽인다', 고.

3호는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더이상 들을 가치가 없는 이야기였다. 이 세계에서 두 번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상관없는 일이다. 3호는 그대로 대답하지도 않고 1863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서슬에 담벼락 몇 개에 금이 가고 도로 바닥 일부가 부서졌다. 3호의 손가락 끝에 1863호의 기계 안구가 잡혀들었다. 통각을 거의 느끼지 않는 보안형 안드로이드 둘이 얽히면서 주변의 가로수와 벽만이 비명을 내질렀다. 얼굴 반쪽이 뜯겨나간 1863호가 그제야 3호의 의도를 알고 온 힘을 다해 3호의 복부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3호는 옆구리가 뜯겨나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그대로 1863호의 어깨를 잡아뜯었다. 물리적인 무기조차 의미가 없어 서로의 손으로 뼈와 기관을 박살내고 잡아빼는 기괴한 광경이 이어졌다. 기어이 3호가 1863호의 다리를 붙잡아 앞뒤로 비틀며 부섰을 때에야 1863호가 서서히 활동을 멈췄다.

...너는 실패한다.

서서히 작동을 멈추는 1863호를 내려다보며 3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신을 죽인다는 보고는 한치의 거짓도 없이 들어맞았다. 1863호는 그대로 사고를 없애고, '유중혁'을 살리고, 그러면 '김독자'는 신이 되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 생을 마감하고, 그리고...

1863호의 몸이 노이즈 낀 홀로그램처럼 지지직거리더니, 어딘가로 돌아가고 있었다. 더이상 3호가 알 바가 아니었다. 3호는 1863호의 잔해를 손에서 내버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제야 3호는 그사이 다가온 누군가를 보았다.

3호와 유중혁의 눈이 마주쳤다.

아.

3호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저것이 진짜 '유중혁'이었다. 유중혁은 큰 소리가 나서 보러왔다가 겁을 먹은 것인지, 굳은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며 주춤거리고 있었다. 자신이 본 것이 실제인지 아니면 영화 촬영 같은 종류인지 판단하는데 꽤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았다. 3호는 '유중혁'을 찬찬히 훑어보면서 씨익 웃었다.

저것이다.

그리고 천천히, 아까 차주가 도망친 검은 차로 향했다.

저것이 죽어야 김독자가 신이 된다.

뒤늦게 상황을 알아챈 건지, 둔한 건지, 아니면 시민 의식과 사명감이라도 있었는지 '유중혁'이 천천히 뒷걸음질치면서 제 주머니를 뒤졌다. 핸드폰을 여는 손길이 식은땀에 젖었는지 미끄러지고 둔했다. 일반적인 안드로이드보다 식견이 넓은 3호가 2만년 전의 고물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무작정 전진시키는 방법 하나쯤 알아차리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3호는 차를 작동시키며 웃었다. 신을 죽인다고? 그래서 김독자를 행복하게 살다가 죽도록 놔둔다고?


나에게 '김독자'는 오로지 단 한 명 뿐이다!


악셀을 밟으며 단순간에 속력을 올린 차가 괴로운 듯 엔진 소리가 커졌다. 유중혁은 제때 도망치지 못했다. 그대로 3호가 전속력으로 몬 자동차는 앞으로 질주했다. 정확히 목표물을 향해서였다. 쾅, 하는 소리가 울리면서 무언가가 보닛에 부딪히고, 차창에 부딪치고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차 뒤쪽으로 툭, 하고 땅으로 떨어졌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비명도 없이 무언가의 생명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땅끝까지 번지는 피를 보며 유중혁은 웃기 시작했다. 차량의 충돌과 함께 강한 충격을 받은 제 몸은 이미 1863호가 그랬던 것처럼 노이즈가 일어나고 있었고, 이대로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아닐지도 알 수 없었지만 3호는 머리끝까지 희열에 가득찼다.

1863호는 실패했고 

내가 신을 구했다!

그는 성공했다

-그리고 나의 김독자는 영원할 것이다!





김독자는 또다시 누워 있는 유중혁의 옆으로 갔지만 도저히 오래 버틸 수 없었다. 그 상태로 죽음을 앞둔 유중혁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남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임종을 지키지 못해 안달인 것 같았는데 김독자는 그걸 보는 순간 제 삶도 같이 끝나버릴 것 같았다. 의사는 이틀, 사흘 정도는 더 버틸 수 있다고 했다. 그게 말 그대로 생명의 기한을 의미하는 거라곤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김독자는 그냥 그 말만 부여잡고 망연히 병실을 나왔다. 아직도 해가 채 지지 않아 사방이 밝았다. 김독자는 무너지기 일보직전이었는데 세상이 너무나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상황을 헤쳐나갈 길이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같이 헤쳐나가야 할 유중혁이 저런 꼴을 하고 누워 있었다. 

유중혁이......사고를 당한 장소가 어디라고 했더라?

유중혁은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인 것 같았다고 했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사고 장소에서 5m쯤 떨어진 곳에 이미 조심히 내려놓은 장바구니가 발견되었다고 했다. 근처에 있는 편의점과 가게만 들어도 김독자 역시 그 위치를 알고 있었다. 김독자 역시 몇 번이고 오간 바로 그 길목이었다. 충분히 찾아갈 수 있었고 알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거길 찾아가서 뭘 어쩌겠다고? 이미 일어난 사실을? 중얼거리면서도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사고가 난 장소는 어디인지 알고 있다. 사고를 낸 차량이 당시 차주가 몰고 있지 않았으며 차주가 모든 기억을 잃어서 아무 증언도 없으나, 다른 곳에서 쓰러져 있는 것이 발견되어 알리바이는 충분하다고 했다. 차를 몰았을 누군가에 대한 기록은 아무데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누구에게도 유중혁이 저렇게 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가 없고 생명은커녕 병원비조차 보상받을 수 없었다. 김독자의 안에서 눈물로 얼룩진 복수심이 끓어올랐다. 비틀비틀, 김독자는 사고가 일어났던 장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유중혁이 흘린 피가 지면에 스며들기도 전이었다. 부서진 1863호와 3호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직후였다. 유중혁은 자기를 친 사람이 누구인지 보았으나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었다. 너무 순식간이고 충격적이라 곧 잃어버릴 기억이었다. 온몸이 지독하게 아팠고 찢어진 것 같았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보이는 하늘이 노랬다. 누군가가 다가와서 유중혁의 몸에 손을 대고 있었다. 처음에 유중혁은 그것이 자기를 차로 친 그 사람인 줄로 알았다. 왜냐하면 상대의 얼굴도 가해자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은밀한 모략가는 조용히 유중혁을 내려다보았다.

......

유중혁은 조용히, 죽어가는 유중혁을 내려다보았다.

유중혁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모두 알고 있었다. 유중혁은 여기서 빈사 상태로 간신히 살아나며,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유중혁을 살리기 위해 김독자는 신에 자원한다. 이 유중혁은 정신을 차리고 나서 기계로 범벅이 된 자신의 몸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기계가 되어버린 김독자를 볼 것이다. 그리고 그 김독자를 지키기 위해 스타스트림이란 보안 회사를 만들고, 이만 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렇게...

......그렇게......

은밀한 모략가는, 천천히 유중혁과 눈을 맞추며 무릎을 구부렸다. 기계 골조 위에 굳은살이 박인 것까지 재현한 가짜 피부가, 피에 젖은 진짜 피부를 쥐었다. 유중혁은 아직까지 살아 있었지만, 여기서 은밀한 모략가가 손에 힘을 강하게 쥐면 곧바로 목이 부러져 즉사할 것이다. 은밀한 모략가는 알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너를 살리면.

내가 여기서 나를 살리면...

은밀한 모략가는 이미 회귀지점에 대해 알고 있었다. 회귀지점을 통해 들어간 과거는 그 어떤 방식으로든 바꿀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은 이미 쓰여졌으면서 동시에 쓰여지고 있는 일이고, 일어났으면서 일어날 일이었다. 여기서 유중혁을 죽이면 은밀한 모략가의 이만 년의 세월이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회귀지점은 그걸 허락하지 않는 기계였다. 그러나 회귀지점이 아니더라도,

그런 문제들이 아니더라도 은밀한 모략가는 자신이 유중혁을 죽이지 못할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은밀한 모략가는 유중혁의 목을 쥐었던 손을 천천히, 머리 위로 옮겼다. 머리쪽에서 빠른 속도로 혈액이 빠져나가고 있었고, 특히 파편에 깊게 베인 눈 쪽이 심했다. 진작에 쇼크사하지 않은 게 기적일 정도였다. 은밀한 모략가는 섬세하게 손가락을 움직였고, 열기와, 약간의 타는 소리와 함께 유중혁의 머리 일부가 살짝 지져졌다. 출혈이 조금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정도면 유중혁은 구급차가 올 때까지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응급조치를 끝낸 은밀한 모략가는 자리를 떴다. 주변의 CCTV를 없앨 시간이었다. 그러나 일을 다 끝마치고 나서도 은밀한 모략가는 그 주변을 쉽사리 뜨지 못했다. 회귀지점 내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만 년의 세월이 시작된 그 장소를 떠날 수 없었다. 그는 사고 지점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자리에서 얼굴을 가린 채 한참을 서 있었다.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지 스스로 자각하고 생각하게 될 때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처음에 은밀한 모략가는 그것이 환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환상이라기엔 너무 뚜렷한 존재였다. 그리고 이곳은 그의 이만 년에 걸친 환상이 여전히 생존하는 유일한 시대였다. 은밀한 모략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실성한 사람처럼 울면서 김독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은밀한 모략가는 그제야 자신이 이만 년동안 제일 하고 싶었던 것을 깨달았다.

...그는 김독자가 보고 싶었다.





사고 지점에 갔지만 김독자는 거기서 그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오로지 꿈에서도 잊지 못할 만큼 혈향이 깊게 배인 도로 한켠 바닥만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돌아왔을 뿐이었다. 더이상 쥐어짤 물이 몸에 없다고 느껴졌는데도 이불이 계속 젖었다. 김독자는 씻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방 안을 기어다녔다. 분명히 집안에 유중혁이 있어야 했는데 없었다. 그 어디에도 멀쩡한 유중혁이 없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온 세상이 더 이상 그런 나날은 없다고 계속해서 김독자에게 되새겨주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이래서는 안 되는데...

김독자는 울다 말고 탈진해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차가운 바닥에 기댄 채였다. 얼굴에 눈물이 말라붙어 따가운 소금기도 그대로였다. 몇 번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차라리 이대로 죽으면 좋을 성 싶었다.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고 한참 후에 눈을 떴을 땐, 사위가 어두웠다. 김독자는 문득 바닥에 붙은 채 눈을 감았던 자신이 침대 위에 곱게 뉘여져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누군가가 닦아주기라도 한 듯 얼굴도 닦여져 있는 것도 느꼈다. 김독자는 순간 유중혁에게 일어났던 그 모든 일이 꿈이 아닌가 의심했으나 여전히 뜨거운 물에 불린 듯 달아오른 눈은 그대로였으니 그럴 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럼 지금 밖에서 걸어다니는 저 소리는?

김독자의 뇌리에는 여전히 선명하게, 피범벅이 되어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유중혁이 남아있었다. 산소호흡기도 그 위를 덮고 있고 온갖 링거와 각종 기계들이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것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 꿈일 리가 없었다. 차라리, ...

김독자는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켜 앉았다. 김독자가 일어나 앉는 소리를 들었는지 거실을 서성이던 누군가의 발걸음이 침실로 향했다. 정확히 똑같은 보폭, 똑같은 걸음걸이로, 똑같은 방식으로,

아아,

유중혁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꿈이다.

김독자는 문을 열고 들어온 멀쩡한 유중혁을 보며 실성한 듯 웃기 시작했다. 다시 눈에서 물이 주륵주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유중혁이 살아 돌아왔는데 이게 현실일 리가 없었고 김독자가 필사적으로 이 상황을 부정해야만 하는 모든 게 웃기고 죽고 싶었다. 꿈이라면 너무 끔찍한 꿈이었고,

...유, 중혁?

영원히 깨고 싶지 않았다.

유중혁이 빠른 걸음으로 침대에 다가오자 김독자는 괴성을 내지르며 유중혁에게 달려들었다. 힘 없는 팔과 다리가 유중혁의 몸을 껴안고 얽었다. 계속해서 손이 깍지를 껴고, 또 껴고, 목을 감고, 다시 또 허리를 껴안고, 팔을 잡아당기고, 다리를 얽고, 계속해서 몸을 붙이고 또 붙였다. 김독자는 한참 동안 헐떡거리며 울면서 유중혁을 절대 놓지 않으려는 듯 껴안기만 반복했고, 유중혁은 잠시 후에야 김독자의 몸에 팔을 둘러 껴안았다. 김독자는 그제야 목놓아서 울기 시작했다. 이제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울음이었다. 한참을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울다가 목이 쉬어 소리가 나오지 않자, 유중혁이 한 손으로 김독자를 안아든 채로 떠다놓은 물컵을 들었다. 김독자는 유중혁이 먹이는 물을 받아먹고는 한참 동안 상처받은 짐승처럼 웅크려 숨을 몰아쉬다가, 겨우 진정했다. 김독자는 얼굴을 들었다. 너무나도 생생한 꿈이어서, 꿈인데, 지금 깨면 두 번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유중혁의 얼굴을 더 보고 싶었다. 김독자가 눈을 들어 유중혁과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심히 거슬리는 것이 보였다. 유중혁의 얼굴에 원래 없던 흉터가 거기에 있었다.

김독자가 벌벌 떨리는 손을 들어 유중혁의 눈가를 쓰다듬었다. 깊고 우묵히 패인 흉터가 거기 있었다. 한순간 정말로 이 꿈 속에서, 유중혁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으리라고 믿던 찰나의 희망이 와르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또다시 울 것 같은 김독자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은밀한 모략가가 입을 열었다.

김독자.

......

김독자.

......어...

......

김독자의 대답은 그 짧은 음절 안에서도 심하게 뭉그러져 있었다. 은밀한 모략가는 한참 말을 고르다가 겨우 한 마디를 꺼냈다.

나는 괜찮다.

이 만년 간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말.

...나는...괜찮아질 것이다.

......

김독자의 얼굴이 또다시 일그러졌다. 은밀한 모략가는 김독자를 껴안았다. 으레 상처받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란히 서로를 껴안은, 한 몸으로 붙어 떨어지고 싶어하지 않는 어린 짐승들처럼,

...나는 살 것이다.

이만 년 만의 포옹이었다. 그때에 김독자의 양 팔이 은밀한 모략가의 목 뒤쪽을 휘감았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김독자는, 서서히 눈을 떴다. 김독자를 껴안고 있는 유중혁의 팔은 뜨겁고 단단하고 살아 있었지만, 그래서 김독자는 더 느낄 수 있었다.

유중혁이 무엇인지를.





3호는 눈을 떴다.

충격 때문인지 회귀지점 안에서 튕겨나오듯 몇 번을 구르긴 했지만,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사위가 고요했다. 마치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이 거짓말이라도 된 것 같았다. 1863호는 부서져서인지 잔해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마 그에게 걸맞는 시대로 돌아갔을 것이리라. 3호는 회귀지점에 들어가기 전의 기억을 다시 하나하나 되짚었다. 위치추적기는 GDB 내부로 향했고, 신의 근처에 있다가 이 창고로 향했다. 창고에 김독자가 없다면 그 전에 1863호가 김독자를 두었을 곳이 어디인지는 뻔했다.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3호는 GDB로 뛰어들어갔고 얼마 가지 않아 비품실에서 억지로 닫혀진 철판을 뜯어냈다. 3호가 맨 처음,

김독자를 백업시켜 꺼냈던 바로 그 자리였다.

김독자는 상당히 놀라있던 듯 3호를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일부 관절이 부서지고 파손된 게 눈에 보이는 3호의 상태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또는 3호의 발치에 묻어있는 희미한 핏자국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3호는 개의치 않고 곧바로 김독자를 껴안았다. 그리고 그러자 김독자도 작은 팔을 내뻗어 3호의 목에 둘렀다. 제 목 뒤로 고사리같은 작은 손이 겹쳐지는 순간 그제야 3호는 안심했다. 돌아왔다.

김독자.

응.

나는 너를 영원히 지킬 것이다.

이 김독자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신은 죽지 않았고, 그래서 모든 것은 원래대로 되었고, 그래서 지금 3호의 품 안에는 여전히 살아있는 김독자가 있었다. 그것으로 되었다.

3호는 곧바로 김독자를 품에 안아들고 연구소의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3호는 행복했다.





김독자는 창문을 넘어 흘러들어온 햇빛에 잠을 깼다. 해가 막 뜨고 있는 아침이었다. 머리가 온통 멍했고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몸은 생각보다 괜찮은 것도 같았다. 어제 탈진할 만큼 울었지만 간밤에...

깨어난 김독자는 생각했다. 그건.......

간밤에. 김독자는 고개를 들었다. 식탁에 물 한 컵과 데운 인스턴트 죽이 있었다. 김독자는 자신이 정신이 없는 모양에도 물과 먹을거리를 챙길 만큼 정신머리는 남아 있는 모양이었구나, 생각했다. 유중혁이 봤으면 참 좋아할 만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유중혁은 죽어 있었고, 수술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간신히 목숨만 붙들어놓고 있다.

하지만 간밤에 꾼 꿈에선 유중혁이 살아 있었다.

김독자는 천천히 거실로 걸어 나와 물 한 컵을 마셨다. 찬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며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어제만 해도 죽을 것 같았고 지금도 죽을 것 같았는데,

...살릴 수 있구나.

지금은 김독자가 붙잡을 수 있는 무언가가 생겼다.

유중혁을 살릴 수 있다.

이것은 예지몽이다.

이것은 김독자에게 내려지는 하나의 어떤, 계시였다.

유중혁은 죽지 않을 것이다.

김독자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의사는 유중혁이 하루나 이틀을 더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했지만 굳이 그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자신이 무엇을 그렇게까지 두려워해서 결정하지 않았는지조차 의문이었다. 돈은 구하면 되고, 유중혁은 살리면 된다, 그리고...

김독자는 핸드폰을 들었다. 전화번호를 누르는 손길에는 거침이 없었다. 연구소의 번호 정도는 외우고 있었다.

김독자도 알고 있었다. 유중혁은 기계의 존재가 되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혼자 남는 것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유중혁은 김독자와 함께 오래오래 살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렇게 인간으로서 적당히 살고, 제때에 제 수명을 다 하고 평범한 인간처럼 죽기를 바랐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김독자가 유중혁을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김독자는 아직까지도 제 몸을 껴안은, 살아있는 유중혁의 감촉을 기억하고 있었다. 평생 원망을 받더라도, 영원히 원망을 받더라도 상관없었다.

여보세요. 

...내가 영원히 너랑 같이 있을게.

팀장님, 접니다.

내가 네가 몇 만년간 살아가도 괜찮을 만큼 멋진 세상을 만들게.

...자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내가 널 위한 세상을 영원히 유지할게.

유중혁이 언젠가 다시 눈을 뜰 때에는 모든 것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너를 살려 네가 영원을 살게 된다면, 나는 그 세상을 영원히 유지하겠다.



갑작스러운 메시아 프로젝트의 자원에 팀장은 난색을 표했지만 자원을 말릴 수도 없었다. 더더군다나 메시아 프로젝트는 자원이 부족해서 지지부진했던데다가, 자원자가 신이 되는 조건에 맞느냐ㅡ세상을 영원히 긍정적으로 평화롭게 유지시킬 의지가 있으며, 충분한 지식을 갖고 식견이 넓으며 신으로서의 자신을 버틸 수 있느냐ㅡ하는 문제도 늘 골치였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과학자가 어떤 심경의 변화를 맞아 자원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보다 더 지식이 풍부하고 세계를 유지할 의지가 가득한 자원자를 찾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몇몇 과학자들은 그의 선택에 놀라기도 하고 당혹하기도 했지만, 또 다른 어떤 이들에게는 괴짜 과학자의 '과학을 위한 희생'이 마치 영웅담처럼 돌기도 했다. 그러나 김독자는 돈을 위한 것으로 일축했다.

김독자의 요구 조건은 아주 간단했는데, 자원의 댓가로 받는 최대한 많은 돈을 그대로 특정인에게 상속시키는 것이다. 김독자는 철저하게 계약서를 써내려갔으며 자신의 유언을 실행시켜줄 변호사도 구했다. 결국 김독자가 신이 되는 것에 성공만 한다면 그때부턴 김독자의 생각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질테니 그런 안배도 필요없어지겠으나, 김독자는 미래를 별로 믿지 않았다.

유중혁은 민간인으로서는 최초로, 엄청난 돈을 연구소에 기부한 상류층만이 받는 기계결합-소생 수술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때쯤 김독자는 자신이 벌인 일의 결과를 직접 확인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신으로 자원한 김독자는 여러 테스트를 거쳤다. 테스트의 주요 초점은, 신은 자신이 습득하는 정보들로 시스템에 오류를 일으키지 않을 만큼 선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사형수와 무기징역수들로 실험한 결과 일부러 '악의'를 가지고 시스템에 오류를 일으키는 케이스가 있다. 하기야, 신이 된 상태에서도 당사자가 '자아'를 유지하고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일정 시간 이상 그렇게 인간도 무엇도 아닌 상태로 기계에 담궈진 채 세월을 보낸다면 언젠간 자아가 흐려지고 그 역할에만 충실할지 모르는 일이지만, 당장 신이 된 사람들은 좀체로 버티질 못했다. 짧게는 하루 만에 오류를 일으키고 길게는 한달을 버티다가도 모든 작업을 중단하기가 일쑤였다. 세계를 유지하고 이 역할을 해내겠다는 강한 의지나 동기가 없는 이상, '신'이 되기 위한 실험체들은 빠르든 늦든 신으로 살기를 그만두기 마련이었다.

그러므로 신이 되기 이전 실험에선 신을 속이는 것이 필요했다.

실제로 세상의 실제 데이터베이스랑 아직 연결되지도 않았는데, 복제하여 실제의 데이터와 다른 더미 데이터를 잔뜩 주어 그것이 실제 세상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실험으로 신은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세상을 경험하고, 그 세상에서마다 충실하게 신으로서의 역할을 해내 보여야 했다. 그 어떤 세상에서도 신이 '악의 없이' 최선을 다해 세상을 유지하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어야 검증이 제대로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하나의 세상이라도 버리고, 짓밟고, 장난질을 한다면 신은 신이 될 수 없다. 단순히 언제든지 자의로 오류를 일으킬 수 있는 골치 아픈 통합 AI가 될 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신'의 출현은 기적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다른 누구도 아닌 김독자였기에, 그는 성공할 수밖에 없었다. 김독자는 그 모든 세계를 최선을 다해 유지하려고 했고, 그 모든 세상을 실제의 세상처럼 믿었다.

그러니까, 그 모든 세상에 유중혁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유중혁이 존재하는 세상을 도대체 어떻게 김독자가 망가뜨릴 수 있겠는가?


김독자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가짜 세상들을 모두 성공적으로 운영해냈다. 그 과정에서 김독자 개인의 취향과 기호는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오로지 더 좋은 세상, 더 편리한 세상, 유중혁이 살아가기에 전혀 무리가 없을 듯이 누구라고 괜찮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내기 위한 모든 계산과 방법이 동원되었다. 과학자들은 김독자가 신으로서 해내는 모든 선택과 방향성에 크게 만족했다. 김독자가 운영하는 세상은 완벽했다.

그것은 정당하고,

그것은 공평했으며,

그것은 모든 인간을 사랑했다.

한때 김독자라는 이름을 가진 신은 모든 인류에게 동일하게 보편적으로 삶을 개선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 많은 인간들 중에 누가 유중혁일지 누가 알겠는가?

수십, 수백, 수천 만 개의 세상이 김독자에게 연결되었다가 사라졌다. 몰려오는 과부하와 고통을 이기고도 김독자는 신으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었다. 그렇게 백 년, 어느 날 결국 실제의 세상에 '신'이 출시되고 유지되었다. 그렇게 몇 백년이 또 흘렀다. 김독자는 살아있는지 아닌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유중혁을 그리면서 세계를 유지하는 데에 힘썼다. 그러나 신의 입장에서 수집할 수 있는 정보량만으론 그 어디에서도 유중혁을 찾을 수 없었다. 한참, 진공관에 갇힌 김독자의 이식이 피폐해져갈때쯤,

그때에 김독자는 그토록 그리던 유중혁을 CCTV를 통해 목도했다.

그것은 최초의 보안형 안드로이드, 1호였다.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3호의 예상과는 다르게, 이번 도주가 오히려 더 쉬웠다. 마치 세상 모든 것이 그들의 도주를 독려하는 듯 길에 막힘이 없었고 통행도 쉬웠다. 3호는 김독자를 데리고 아예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로, 끝없이 내려가고 또 내려갔다. 아예 세상과 멀어질 생각이었다. 가는 길 내내 김독자는 3호에게 이것저것을 읊었다. 이 도시는 방범 수준이 어떻고, 치안이 어떻다. 아마 여기로 가면 우리는 잡히지 않을 것이다. 이곳은 조금 위험하긴 하지만 신분 위조가가 많고 잘 잡히지 않는다. 이 길로 가면... 김독자의 이야기를, 신으로서만 할 수 있던 경이로움을 계속 듣던 3호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날 밤 김독자를 무릎에 앉혀놓고 한 가지 이야기를 꺼냈다. 다소 파격적인 제안이었지만, 의외로 김독자는 한참 동안 3호의 이야기를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되었든, 김독자는 신이 아닌 김독자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 다음 날 3호는 김독자의 손을 잡고 안드로이드를 정비하는 어떤 가게로 갔다. 한 기밖에 없는 특수형 모델 안드로이드와 정서형 안드로이드의 조합을 엔지니어는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그저 주인의 심부름을 받고 온 두 안드로이드겠거니 생각하고 넘기려는 듯했다. 금액을 치루고 자리에 앉아 수술대가 준비되길 기다리면서 김독자는 문득, 3호에게 물었다.

...이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싫은가?

김독자는 곰곰이 생각하다 대답했다.

나는 그냥...네가 원하는 것을 할게.

3호가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ㅡ그게 내가 원하는 것이니까.

3호는 무어라 대답하려고 했지만 그때에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정비사의 말이 들려왔다. 3호는 김독자를 한 번 힘주어 안았고, 김독자는 마주 3호를 껴안은 후 두려움 없이 수술실로 향했다.

안드로이드의 권리와 존중을 말하는 시대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사람들은 보존하는 기능보단 파괴하는 기술에 능숙했다. 이내 뇌 안쪽까지 침투에 들어간 철심은, 메모리 부분을 일정량 녹이면서 완전히 파괴할 것이다. 그 후 메모리를 녹여 빼낸 자리에는 백업한 기억이 든 새 메모리를 다시 넣을 것이다. 그러나 이전과는 같지 않다. 대체로 메모리의 교체는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특정한 기억을 지우기 위해 시도한다.

김독자의 안에도 온전히 '김독자'로서의 기억이 있다.

그 어리고 불행했던 16세 시절, 범죄에 연관된 인물로 등록되었던 어린 김독자의 기억.

그리고 수술은 그 기억을 남기고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다.

그리고 신은 모든 신으로서의 세월을 지우고 다시 어린 김독자로 온전히 돌아갈 것이다. 그 다음 김독자는 3호의 품에서 눈을 뜰 것이고, 3호를 3호라는 넘버링 없이 온전한 유중혁으로 인식할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먹고 자고 숨쉬는 자신을 안드로이드가 아닌 인간으로 인지할 것이다.

어떤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연유로, 미래에 오게 된 어린 아이 김독자로.

그렇게 열여섯 살의 어느 김독자는 유중혁의 품에서 눈을 뜨고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3호는 누워 있는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수술대 위에 누운 신이 3호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ㅡ이따 보자, 유중혁.


그날은 그 둘만의 부활절이었다.





은밀한 모략가가 회귀지점에서 돌아오자 구원의 마왕은 말 그대로 웃으며 반갑게 맞았다. 3호는 어디 있느냐거나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등의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태도에서 은밀한 모략가는 문득, 깨달은 것이 있었다. 1863호가 기존의 신에게 끝없이 접속하여 락이 걸린 정보들을 잠금해제하며 읽어냈다면, 결국 신도 그 자료를 열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알고 있었군.

뭐가?

구원의 마왕은 그저 빙그레 웃었다. 은밀한 모략가는 한참 28세의, 김독자의 얼굴을 하며 빙글빙글 웃는 홀로그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 후에 나직이 내뱉었다.

네놈은 진짜 마왕이다.

과연 마왕은 협조적이지 않았다. GDB 내에서 3호가 다시 신을 데리고 빠져나간 것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그 퇴로에 혼선이 일어나서 대기하고 있던 특수부대 안드로이드들조차 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구원의 마왕이 개입한 게 분명했지만, 설명할 수 없었다. 정부 관료들의 '신'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었으며 그에 비해 스타스트림은 너무나 작은 회사였다.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 뻔히 보였지만 은밀한 모략가는 다소 초연했다. 그에게는 이제 모든 것이 더이상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정부에서는 다시 3호를 찾아내라고 난리를 쳤지만 은밀한 모략가도 구원의 마왕도 그 요청에 대해 조급해하지 않았다. 구원의 마왕은 이제 대놓고, 정부 쪽에는 아무 자료도 넘기지 않은 채, 오로지 은밀한 모략가에게만 1:1로 3호와 '김독자'의 사진과 영상을 보여주었다. 추적을 위한 자료라기보단 팬이 좋아하는 연예인의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하는 것과 비슷한 태도였다. 구원의 마왕은 내내 기분이 좋아 보였다. 사진 속에 찍힌 3호는, 밝게 웃는 김독자를 안아든 채 거리를 걷고 있었다. 은밀한 모략가는 사진들을 내려다보다가 한소리 할 수밖에 없었다.

...미련한 놈.

누가 미련해?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은밀한 모략가는 굳이 주어를 붙이지 않았다. 그 누구라도 주체로 올 수 있는 말이었다. 은밀한 모략가를 쳐다보던 구원의 마왕이 씁쓸하게 웃었다.

글쎄,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까?

그럼.

...그냥 '다른' 방법도 있었겠지.

은밀한 모략가가 눈을 내리깔았다. 구원의 마왕이 꿈을 꾸듯 중얼거렸다.

각자가 사랑하는 방식대로...

사진을 내려다보는 동그란 뒤통수가 까맸다. 새하얀 홀로그램은 가짜였지만 때론 너무나 진짜같기도 했다. 은밀한 모략가는 구원의 마왕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구원의 마왕이 왜 그리 보냐며 은밀한 모략가와 눈을 마주치고 웃었으나 은밀한 모략가는 웃을 수 없었다. 침묵이 이어졌고, 여전히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은밀한 모략가를 보던 구원의 마왕이 기어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순간 은밀한 모략가가 입을 열었다.

...김독자.

구원의 마왕이 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한순간에 다시 표정을 바꾼 홀로그램이 싱긋 웃었다.

구원의 마왕이라니까.

김독자.

은밀한 모략가는 구원의 마왕의 요청을 무시하고 재차 이름을 불렀다. 은밀한 모략가는 자신의 호칭을 수정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은밀한 모략가를 바라보던 구원의 마왕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처음으로, 웃음기가 걷힌 본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은밀한 모략가가 서서히 자신의 얼굴로 손을 들어올렸다. 느릿하게, 긴 손가락이 베일의 한쪽 끝을 잡아당겼다. 구원의 마왕이 눈을 크게 떴다.

은밀한 모략가는, 천천히 베일을 벗었다.

...네가 보고 싶었다.

구원의 마왕이 고개를 돌려 은밀한 모략가를 바라보았다. 베일을 벗은 아래에는 이만 년 전과 똑같은, 오로지 눈가에 난 흉터 이외에는 모든 것이 똑같은 초연한 표정의 유중혁이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홀로그램으로 구성된 마왕은 제 날개를 접지도 않고,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김독자는 그렇게 오랫동안, 오랜만에 보는 유중혁의 얼굴만을 빤히 바라보았다.

......

......

보고 싶었어.

구원의 마왕이 입을 열었다.

......

복제된 안드로이드가 아닌, 네 얼굴을 보고 싶었어.

처음으로 홀로그램이 울었다.



그날 밤 정부에는 폭탄 선언이 들어갔다. 스타스트림은 해체하고, 책임자인 은밀한 모략가는 더이상 회사를 운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그에 따라 그가 맡고 있던 3호와 사라진 신에 대한 추적은 모두 멈춰지게 되었다. 정부는 은밀한 모략가에게 추적에 필요한 자료를 내놓으라고 일갈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데이터가 모두 사라졌다는 말도 안 되는 답변뿐이었다. 정부는 스타스트림에 전면 소송을 걸기 위해 모든 준비를 하기 시작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 소송은 곧이어 은밀한 모략가가 이어 행한 행위로 인해 전혀 쓸모없게 되었다.

구원의 마왕이 혼자서 세계를 유지하기는 불가능했다. 당장 51%로 백업된 신의 안드로이드를 찾지 못하는 이상, 신이 세계를 유지하는 문제는 매우 시급했다. 신을 유지하는 과학자들은 뒤늦게 부랴부랴 신에 이식할 새로운 인격을 찾았다. 다행히도 자원자는 금방 구해졌다. 자원이라기보단, 자신이 저지른 실책에 대해 담당자가 책임을 지는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전에 신의 보안과 안전을 총 책임지던 수장이었으며, 소문에 따르자면 기계이식 소생 수술 초기의 성공자이기도 한 존재였다. 책임을 진다는 의미라지만 그 누구도 그에게 그렇게까지 신을 잃어버린 책임을 강요하지 않았으며, 본인이 그렇게 하겠다고 했으니 자원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누구보다 신의 작동 원리와 신이 세계를 유지하는 방식을 잘 알고 있으며, 살아온 세월 역시 이만년이 넘으니 그보다 더 적격자는 없을 법했다. 과학자들은 빠르게 수술을 준비했으며, 그는 순순히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고 한다. 그리하여 정부의 소송은 시작도 전에 사라지게 되었고, 마치 떨어진 퍼즐 조각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간 것처럼 일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은밀한 모략가는 자신의 발로 수술대에 걸어들어갔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요구한 조건이 딱 하나뿐이었다. 그 조건조차도 너무 들어주기 쉬운 것이라 큰 문제될 게 없었다.


그의 요구는 딱 하나뿐이었다.

신의 데이터베이스에서, 기존에 존재했던 '구원의 마왕'의 인격을 제거하지 말 것.

두 자아가 같이 있을 수 있게, 덮어쓰지 말고 그대로, 구원의 마왕에게 할당되는 메모리를 남겨둔 채, 자신을 따로 이식할 것.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신을 납치했다, 완결.

결국 어디에 한눈을 팔아도 글쓰기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문의는 side_n_tab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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